다나 김 선자 | 재불작가 seonjaart@gmail.com
외젠 부댕(É. Boudin) : 모네의 스승이며, 인상주의의 아버지다.
4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파리 16구에 있는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에서 외젠 부댕의 작품 전시회가 있다. 먼저 이 미술관을 말하자면 그 명칭에 부합하여 100여 점에 이르는 모네 작품이 소장되어, 그중 일부가 항시 번갈아가며 전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계자 및 파리지앵이 아닌 경우 또는 그림에 조예가 깊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Boudin, 백사장에서의 모임 (1866)
이 미술관에서 그러니까 부댕의 전시가 열린다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모네의 스승이고,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 때문이다. 그가 1844년 장 프랑수아 밀레와 토마스 쿠튀르의 격려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듯이 그는 모네에게 '보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모네 역시 '내가 화가가 된다면, 부댕에게 빚진 것이 있다'라 말하곤 했다.
부댕의 그림에서 보듯이 섬세한 터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빠르고 강렬한 터치로 변하는가 하면, 자주 빛에 의해 윤곽이 부서지는 형태가 모네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물며 파스텔 그림이나 수채화에서는 모네의 그림을 미리 보는 것도 같다.
Boudin, Plougastel, 성당 미사의 출구, 1865-1869
그들의 작품을 가만히 살펴보면, 길게 하나로 이어진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때론 두 세대가 교차를 이루다가 또다시 하나의 획을 그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두 작가의 일맥상통되는 점을 이번 기회 이 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부댕의 전시를 본 후 아래층으로 내려와 모네 작품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Boudin, 브레스트 주변, 엘로른 강 하구 (1873)
루이-외젠 부댕(Louis-Eugène Boudin, 1824-1898)은 1824년 프랑스 북서쪽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아름다운 작은 도시 옹플뢰르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르아브르-함부르크 항로를 운항하는 선박의 선원이었고, 어머니는 이 선박의 객실 청소부였다. 그 역시 어린 시절에 증기선의 선실 소년으로 일하다가 나중에 상점의 점원으로, 특히 문구점과 액자 제작소의 조수로 일하면서 예술가들과 많은 교류를 가진다. 그는 다소 늦은 나이에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그 시대의 예술가, 비평가, 수집가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었다. 예를 들면 에밀 졸라로부터의 극찬은 물론이고,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그에게 태양, 구름, 하늘, 그리고 그것들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효과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기상 미의 화가'란 별칭을 주었을뿐더러, 심지어 '숨겨진 전설을 통해 계절, 시간, 바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필기하기도 했다. 화가 카미유 코로 역시 그에게 '하늘의 왕'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고, 또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파리의 한 상점에서 부댕의 그림을 보고 작가를 만나러 오기도 했다. 그리고서 그들은 향후 친구가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화가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와 특히 클로드 모네를 만난 점이다.
Boudin, 카마레, 툴링게의 끝 (1873)
그리고는 이반 투르게네프와 조르주 페이도를 포함하여,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을 비롯한 많은 수집가들이 그의 풍경화를 구매하기 시작했으며, 그가 무엇보다 화가로서의 성공과 확고한 인정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29년 잔 랑뱅이 그의 그림 중 하나를 구매한 해부터라고 한다.

Boudin, 포트리외, 좌초된 보트 (1872-1873)
외젠 부댕은 해변 장면을 관찰하며, 발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 위대한 해양 화가다.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하늘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매우 자주 그림에서 소재로 나타나는 항구 및 어부들의 삶과 바다와 해안에 관련된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19세기 프랑스 화가들 중 최초로 작업실 밖에서 풍경을 그린 화가 가운데 한 명으로 인상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빛과 광채를 추구하고, 그것을 응축하고, 그 속에서 따뜻함을 추구'하는 것에 열망했다. 그것은 그림의 구성에서 하늘이 항상 매우 넓은 상단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1887년에 쓴 짧은 전기에서 '거대한 빛, 야외, 그리고 하늘의 효과를 재현하는 데 있어, 그 진정성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회화 운동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야망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서신에서는 어지러울 정도로 끈기 있게 작업에 임하면서도 겸손하고, 종종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하려 노력하는, 항상 다른 화가들의 재능을 재빨리 칭찬하는, 열정적인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Boudin, 외항, 항구 풍경이라 불림 (1880)
당시 르아브르 예술협회는 부댕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연필과 붓을 잡았고, 놀라운 감각과 완고한 의지 외에는 다른 어떤 교훈도 없이 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창조적인 화가, 개성과 독창성을 지닌 화가였다.' 1862년부터 부댕은 노르망디에 있는 도빌과 트루빌의 해변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19세기 파리 부르주아와 귀족들이 노르망디 해변을 거니는 모습을 보면서 사교계 명사들과 우아한 여성들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해변 풍경들의 그림을 본 대중들은 관음적이고 엉성하다 생각하여 크게 호응하지 않았으나, 비평가들과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는 많은 관심을 끌었다.
Boudin, 해변의 낚시 보트 (1873-1880)
오늘 전시된 작품들도 대부분 해양 그림이 차지한 가운데 도빌과 트루빌의 해변 장면들은 특히 눈길을 끈다. 그들의 의상과 장신구, 그들의 여유로운 표정에서 당시의 풍요로운 삶과 문화까지 엿볼 수 있다.
노르망디 지방의 도빌과 트루빌은 자매처럼 붙어있는 해변도시로써 지금과 마찬가지 파리와 가깝다는 이유로 파리 부르주아들의 휴양지였다. 이곳은 부댕에게도, 물론 그 의 그림과 삶에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여름과 가을에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그림에 몰두하며 보냈었고, 마침내 도빌에다 집을 마련하기까지 했으며, 1898년에 그는 이 곳 도빌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파리에 머물면서 기절할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 바다를 바라보며' 죽기를 원하여 도빌로 이송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그림에서 새로운 것, 새로운 측면을 제안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빠른 터치의 스케치로 빛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던 화가다. 그의 빠른 터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과감해지면서 뚜렷해진다. 그리하여 그림은 더욱더 자유롭고 강렬한 느낌으로 와닿는다.
Boudin, 좌초된 보트들 (1873-1880)
그는 그림을 그릴 때 햇빛을 이해하면서 그림자, 즉 보다 더 어두운 부분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어두운 면은 신비롭다고도 했다. 화가의 진정한 탐구는 빛을 찾는 것이었다. 이는 브르타뉴 지방 그림에서 더 잘 보여준다. 브르타뉴는 그의 아내 마리-안느의 고향이며, 아내의 가족을 보러 여러 번 방문했던 곳으로 그에게도 중요한 곳이다. 이 브르타뉴 지방의 그림에서 그는 농부들의 옷과 함께 전통, 마을과 밭의 모습들을 묘사하며 지역색을 짙게 나타내기도 했다.
Boudin, 트루빌, 해변 장면 (1874, 1880, 1881)
그리고 오늘 전시에는 그의 독창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파스텔 그림과 수채화가 거의 보이지 않아 참 아쉬웠다. 단 두 점 전시된 드로잉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공중에서 마치 가볍게 날아오르듯 그의 빠르고 날렵한 선과 터치, 그림의, 이 요약된 부분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까지 떠올리게 하는 풍부한 상상력을 안겨준다. 그것은 형상으로 성실하게 채워진, 형태가 있는 것들보다 더 풍성하고 꽉 채운 여백의 미가 진하게 묻어난다. 흡사 동양의 명상을 연상케 하면서.
Boudin, 도빌, 악천후 속 해안 (1890)
부댕은 비교적 60대에 접어들어 서서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의 작품은 1870년대부터 아방가르드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왔고, 생전에 약 4,500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외에 수많은 드로잉, 파스텔화, 수채화 작품들을 남겼다. 현재 그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르아브르(노르망디의 항구 도시)에 있는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은 스케치와 습작을 포함한 224점이 있으며, 옹플뢰르의 <외젠 부댕 미술관>에도 93점이 소장되어 있다. 나 역시 이 화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던 곳도 이십여 년 전 르아브르의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이다.
Boudin11 빌러스 해변 (1891)
전시된 작품들은 대체로 소품 위주다. 그의 작품에는 소품이 많다. 바깥에서 그린다는 풍경화의 특성상 작품크기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Boudin, 도빌 해변의 백사장 (1893)
전시장은 혼잡했고, 공간에 비해 관람객이 너무 많다. 전시공간도 매우 협소하다. 아니래도 비좁은데 그림설명 가이드를 동반한 그룹이 작품을 가로막고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이 섬세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가까이 다가서야 하는데, 감상을 저지하는 해설자의 목소리까지 방해가 적잖다. 전시기획자는 작품의 명성만큼 방문객 수도 많을 것임에 왜 미처 예상하지를 못했을까? 관람객은 물론 명화에 대한 적절한 예우가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Boudin, 트루빌, 정어리 배들의 장비 (1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