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균
우선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겉으로 알려진 것과 실제적인 삶을 다르게 영위했던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의 운명이란 카메라와 대중에게 어떻게 비춰지느냐에 따라 그 명운이 크게 갈리기에 언제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연출의 생을 살아가야 한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어떻게 비춰지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연출된 이미지를 위해 실제적 삶을 매정하게 희생해야 할 때가 더 많다. 은막의 스타들의 생도 그와 다르지 않다. 특히 사회에 의해 규정된 자유 여성의 이미지를 덮어 쓴 채 남성을 위한 성의 대명사 역할을 해야 했던 많은 여성 스타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과 대중적 이미지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커 결국엔 불행한 이슬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보여 지는 이미지가 그 지시 대상과 전혀 다른 것이며 독립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더니즘 이후의 현대인들이 겪어야 하는 존재론적인 갈등이자 정체성 혼란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초기의 자아 분열 현상은 순수성과 자아 표출의 극단적 자유를 주장한 사회적이거나 예술적인, 또는 철학적인 모더니티들의 입김 아래서 미봉된 채로 남아 있어야 했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는 좌와 우의 대립, 동서의 대립에 의해 적과 나의 구분이 명확했고, 미학적인 면에서는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주장하는 그린 버그류의 추상표현주의 아래서 진정한 나와 전혀 다른 외양은 희미하게 녹아버렸다. 그리고 철학에서는 싸르트르류의 실존론적 휴머니즘 덕택에 실존을 거역하는 가상의 삶이란 극단적으로 배척되었다. 이러한 순수함과 단호함, 그리고 배척의 시대가 냉전의 종식, 모더니즘의 실패, 허용주의의 도래 등과 함께 눈 녹듯 스러져 내려갔다. 김동유의 회화도 이런 최근의 사회적이고 미학적인 배경의 변화 위에 세워진다.
그의 그림을 일견하면 우선 냉전 시대의 하이 컬쳐를 대변하는 인물들, 예를 들면 박정희 김일성, 케네디, 모택동, 등소평의 초상화와 그 당시 미국 대중문화와 소비문화를 대변하던 마릴린 먼로, 리즈 테일러, 비비안 리, 오드리 햅번, 다이애나 왕세자비, 엘리자벳 여왕, 그레고리 팩, 클라크 게이블, 헨리 폰다 등의 은막의 스타들이 한데 어울려 미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는 특히 마릴린 먼로의 작은 초상들을 반복하여 케네디나 박정희, 모택동, 김일성 등의 초상화를 빚어냄으로써 정치적으로는 냉전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세계의 대표자인, 또는 자신의 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제왕적 정치지도자들을, 마릴린 먼로라는 여성 대중 스타를 통해 만들어냄으로써 고급문화와 저급 문화 사이의 벽이 허물어졌음도 지시하고 있다. 역으로 케네디의 이미지를 이용해 마릴린 먼로를 만들어냄으로써 남성과 여성 사이의 교대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여기에 또한 흥미롭고 치명적인 욕망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회화가 동일 인물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사건을 배제하기 때문에 피상적으로는 아무런 스토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많은 작은 스토리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초상화 인물들의 극적인 사생활 덕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성 운동이 표면화되기 이전의 이 정치지도자들은 여성 편력이 심했거나 심했을 것으로 오해를 받았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김동유의 초상화들은 권력과 힘, 돈, 섹스 사이의 결탁으로 물들어 있는 현대 사회에 대한 은근한 풍자화이기도 하다. 또한 수많은 다른 그림들에서는 남성은 여성의 초상을 통해 만들어지고 여성은 남성의 초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성적인 교환을 통해 김동유가 밝히고자 하는 사실은 모든 인간 사화는 양성공동체라는 사실이다. 또한 현대 사회의 인간들이 유니섹스화 하고 있음을 말하거나, 인간의 성적인 실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그 인간에 대해 사회가 부여한 이미지로서의 남성과 여성이 존재할 따름임을 말하고 있다. 김동유 회화의 장점은 그 단순함 속에 이렇게 수없이 많은 입문의 길이 열려 있다는 점이다. 단순함과 복잡함의 교대는 시각적 표면을 넘어 의미적인 너머로까지 무한히 확장된다.
김동유에게 현대의 인간들은 실체로서보다는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이는 이미지란 실체적 인간을 지시하는 재현물이 아니라, 지시대상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독자적 존재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김동유의 이미지들은 그것을 이루는 작은 이미지들의 반복에 의해 동일하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 예를 들어 마릴린 먼로는 케네디의 초상들로 이뤄진다. 즉 케네디의 이미지에 의해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작은 세포들의 이미지가 케네디의 이미지라는 사실은, 수많은 대중들이 케네디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상과 이미지가 마릴린 먼로를 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김동유의 작품 속 한 사람의 이미지란 지시 대상인 원본의 실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들이 그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전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의 총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영국 왕실을 대변하는 엘리자벳 여왕의 작은 초상들로 만들어진다. 누구든 다이애나를 생각할 때에 그 사람 자체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둘러싸서 그녀를 만들고 있는 사회적인 이미지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동유에게 개인이란 그 하나의 이미지들처럼 무한히 외롭고 독립적이지만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사회적 콘텍스트에 의해 만들어지고 살아가게 되는 사회적 인간이다. 붓다의 이미지는 수많은 익명의 인물들로 이뤄지거나 마릴린 먼로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작가 김동유가 붓다에 대해 품고 있는 의식, 즉 붓다는 한사람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기도 하다는 만유일체의 사상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김구 초상인 경우, 김동유는 타인의 이미지가 아닌 김구 자신의 이미지의 반복을 이용하는데, 김구라는 독립운동가에 대해 모두가 가진 자주 독립 투사라는 독자성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사한 논리에 의해 반 고흐는 해바라기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한 사람의 화가로서 고흐를 생각할 때에 우리의 집단 무의식은 그가 그린 해바라기를 연상하기에, 김동유는 그러한 무의식의 작동 원리를 회화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작은 초상 이미지들은 작가에게 그렇게 많은 무수한 수효의 생각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대중문화 시대에 걸맞게 김동유의 이미지들은 모두 사진으로부터 차용한 이미지들이다. 사진이 최초로 발명된 이래로 사진은 예술가의 손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미지로 간주되었다. 그 기계적인 이미지라는 이유 때문에 사진은 과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고 예술가들로부터는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은 사진과 경쟁하기를 바라면서 역으로 사진과는 정반대되는 미완성의 그림을 그렸었다. 그러나 쇠라와 같은 점묘파 작가들에게서 사진은 한층 강화된 존재를 과시한다. 즉 점묘파 화가들은 사진의 포토그람처럼 이미지의 각 미세 단위를 정밀하고 과학적으로 포착하려한 것이다. 즉 선택하고 제거하여 중요한 부분만 강조하는 예술적인 묘사 대신에 사진처럼 모든 세부를 빠뜨리지 않고 복원함으로써 과학적인 진실성을 보증하려 했다. 이렇게 화가 개인의 주관성을 제거한 덕분에 사진은 모더니즘 시대에 구박을 받은 이후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와 다시금 각광을 받게 되었다. 김동유는 사진이 이러한 객관성의 담보자라는 잘못 알려진 사실을 교묘히 이용한다. 즉 자신의 이미지의 진실을 담보해주도록 사진 이미지에게 요청한 것이다. 김동유의 이미지들은 외면적 매끈함에 비해 극히 유동적이다. 다시 말해 이중적이다. 각각의 부분들은 독자적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며 주변으로부터 절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서 같은 또 전체이면서 부분으로 돌아간다. 이런 정체성의 이중성은 사진적인 이미지가 주는 진실 게임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즉 사진 이미지들은 자신들이 어떤 진실을 전혀 가감 없이 문서로써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들은 대상의 피와 살과 전혀 닿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시뮬라크르로서 대상 외의 또 다른 대상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하물며 화가 김동유가 심혈을 기울여 직접 손으로 사진 이미지를 본떠 그린 이미지들은 그 이중성에 또 한 번의 이중성을 겹치고 있다. 결국 김동유 회화의 이중성은 여기이며 다른 곳, 지금이며 다른 시간, 나이면서 내가 아닌 것, 이것이면서 저것을 지칭하는 한없이 벗겨지는 양파껍질과도 같은 것이다.